[면세점’s ‘꽃’] 여행과 함께한 루이비통, 면세점서 빛나다 ②
- 아르노 회장과 만난 루이비통
마크 제이콥스, ‘젊음’의 수혈
오랜 명성과 디자인의 새로움 -
- 기사입력 : 2018-01-22 16:39:49
- 최종수정 : 2018-08-27 14:28:06
- 김선호
루이비통이라고 해서 '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흥망성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루이비통의 명성은 점차 시들었다. 오래된 고객을 위해 제작한 여행 가방이 ‘구식’이라고 평을 받았다. 입소문은 점차 퍼지기 시작해 루이비통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여행 가방에도 새로운 장이 펼쳐진 셈이다. 여행 가방으로써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빛낼 수 있는 디자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루이비통엔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이 때에 루이비통은 가스통 비통의 셋째 딸 남편인 앙리 라카미에와 지금의 LVMH 회장인 아르노를 만나게 됐다.


【여행에 경영·디자인 날개를 달다】
루이비통의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오던 때다. ‘구식’이라는 딱지로 루이비통의 위기가 찾아왔다면 ‘경영’이라는 요소는 절벽에서 날개를 달게 했다. 가스통 비통의 셋째 딸 오딜은 앙리 라카미에와 1976년에 결혼했다. 앙리 라카미에는 ‘스티로’ 강판 회사를 운영, 독일 회사 티센에 회사를 팔고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과 함께 루이비통의 경영자로 다시 복귀했다. 그는 먼저 루이비통 제품을 취급하는 중간 상인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 뉴욕 및 아시아 전역에 직영점을 열었다. 또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요트 대회 등을 후원,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다. 1984년 루이비통이 매출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며 브랜드 명성을 다시 회복했다.
1987년 루이비통과 모엣 헤네시가 합병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이 숨겨져 있다. 앙리 라카미에는 두 기업을 합병해 LVMH를 만든 장본인이자 1988년엔 지방시 패션을 인수해 규모를 키운 당사자이기도 하다. 루이비통을 부활시키는 한편 기업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면서 앙리 라카미는 LVMH의 시초를 다졌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앙리 라카미에가 아닌 아르노 회장을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 패션 역사에서 앙리 라카미에와 아르노 회장 간의 치열한 인수합병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으며, 당시 크리스찬 디올을 운영하던 아르노 회장의 품에 LVMH가 넘어갔다. 앙리 라카미에의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아르노 회장은 루이비통의 날개를 더욱 활짝 폈다. 아르노 회장의 신의 한 수는 1997년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 루이비통을 패션 라인까지 확장하도록 한 것이다. 처음으로 루이비통 슈즈 컬렉션도 선보이던 때다.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에 없던 여성복 라인을 론칭하는 한편 2001년엔 자신의 관심 분야인 예술을 패션에 더해 콜라보레이션 열풍을 이끌어냈다.
루이비통의 갈색 모노그램 패턴 위에 형광빛 낙서 디자인을 가미하도록 하고, 무라카미 다카시의 알록달록한 일러스트로 모노그램을 재해석했다. 무난하거나 무거웠던 루이비통 모노그램이 현대에 맞게 재해석된 사례다. 당시 명품의 무거웠던 무게를 빼는 작업은 엇갈렸다. ‘너무했다’ ‘지나치다’부터 ‘새롭다’ ‘독특하다’는 평이 쏟아졌다. 물론 당시 루이비통 매출에서 의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지는 않았으나 ‘화제성’만큼은 독보적이었다.
이후 2013년 루이비통은 수석 디자이너로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새롭게 영입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발렌시아가의 수석 디자이너로 15년을 보냈으며, 그가 루이비통과 함께하게 됐다는 소식만으로도 패션계에 화제를 불러 모았다. LVMH 아르노 회장은 명품의 대중화에 있어 이슈를 계속해 창조, 루이비통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항상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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