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체험기] DAY 3 :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은 없다
- "뻣뻣한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
- 기사입력 : 2021-08-30 09:05:44
- 최종수정 : 2021-09-28 09:44:28
- 차민경 기자
#1.
오전 10시쯤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었다. 오늘도 바다가 고요히 빛났다.
TV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Colour’를 틀어놓고 하루를 시작했다. 영국 BBC에서 하는 다큐멘터리인데 자연 속 동물들의 색깔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벌새는 현존하는 가장 작은 새라고 한다. 몸길이 5cm, 몸무게 1.8g밖에 안 되는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생명체.
난 벌새가 갈색인 줄만 알았는데 열대우림에 있는 벌새는 스스로 발광하는 듯한 형광빛이다. 아마 열대우림 색깔이 화려해서겠지? 반짝거리는 작은 새들이 너무 귀엽다.
![]() |
▲ 사진=Chris Charles (Unsplash) / 화려한 형광빛의 벌새 |
그런데 여기서는 내가 생전 찾아서 본 적 없는 다큐멘터리가 끌리더라.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었다.
인생을 바꾸려면 장소, 시간, 사람이 바뀌어야 한단다. 즉 사는 곳을 바꾸고 시간을 달리 쓰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면 인생이 바뀐다는 거다. 이 중 장소만 바꿔도 나머지 2가지가 자연스레 바뀌는 건 아닐까? 장소가 바뀌니 시간을 다르게 쓰고 싶어 지고 만나는 사람도 당연히 달라진다.
자연 속 동식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솔직히 재미는 없다. 근데 그냥 평화롭고 좋다.
#2.
숙소 근처 카페에서 점심 겸 커피를 했다. 이름하여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 애호가라는 뜻이란다. 예술이나 학문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게 아니고 취미처럼 이것저것 즐기는 사람.
![]() |
▲ 사진=차민경 기자 / 카페 딜레탕트의 외관.(2021.04.28) |
카페 주인 부부는 커피도 음식도 가구도 즐기는 것 같다. 커피도 맛있고 키쉬라는 제주에서는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음식을 파는 것도 재밌다.
키쉬(Quiche)는 부드러운 파이에 계란, 생크림, 베이컨 같은 재료를 채워서 먹는 프랑스 가정식이라는데, 부드러운데 느끼하지 않고 무엇보다 아메리카노랑 찰떡이다.
![]() |
▲ 사진=차민경 기자 / 키쉬와 에그타르트. 간단하지만 든든한 한 끼였다.(2021.04.28) |
개인 공간도 아니고 상업 공간인데 모조품이 아닌 진품 디자이너 가구를 들여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모던하고 심플한 공간. 살짝 심심한 느낌도 있지만 뷰와 합쳐지니 나름의 매력이 있다.
![]() |
▲ 사진=차민경 기자 / 제주의 자연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2021.04.28) |
![]() |
▲ 사진=차민경 기자 / 딜레탕트 내부.(2021.04.28) |
#3.
카페와 숙소 사이엔 꽤나 긴 언덕길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냥 그림같이 예쁘기만 한 풍경. 굽이굽이진 논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야자수들.
한국보다는 묘하게 영국 시골 느낌이 나는 이국적인 곳이다. 그림 같은 풍경이 아름다워 남편과 사전답사 왔을 땐 신나서 사진을 잔뜩 남겼었다.
![]() |
▲ 사진=차민경 기자 / 숙소 사전답사하던 날 행복해보이는 나(2021.03.21) |
그런데 카페에서 숙소를 오고 가면서 보니 쓰레기도 눈에 띄고 벌레도 종종 보인다. 멀리서 보면 마냥 예쁘기만 한데 막상 가까이서 보면 소위 지저분한 것들이 잔뜩이다.
예전에 넷플릭스로 블랙 미러(Black Mirror)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 가상세계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가상세계에 대해 여주인공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는 꽃과 풀이 가득한데 벌레가 한 마리도 없어요. 그게 너무 징그럽지 않아요?”
사람과 동식물이 사는데 쓰레기랑 벌레는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4.
이효리 요가 선생님 제자의 제자분(친구 왈 그건 거의 남 아니냐고... 그러나 말거나 이 분은 진짜다!)에게 요가를 배웠다.
전형적인 요가원이 아닌 선생님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요가를 해서 더 특별한 느낌. 평소에 하던 필라테스보다는 요가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몸을 배배 꼬아야 해서 더 어렵다.
난 체형이 가늘고 긴 편이라 어릴 때부터 내가 유연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난 슬프게도 심각하게 뻣뻣한 몸치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고장난 고양이 수준이랄까.
요가가 끝나고 선생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데 선생님이 내 맘을 알아채셨는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언뜻 보기에 유연한 건 좋기만 하고 뻣뻣한 건 나쁘기만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유연하면 유연한 대신 근육이 약해서 쉽게 다칠 수 있거든요. 뻣뻣한 사람들은 그만큼 튼튼하고 근육도 잘 붙어요.”
34년간의 뻣뻣이 인생에서 내 뻣뻣함을 긍정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말이었다. 역시 제주는 힐링의 도시구나.
▲ 사진=@sonya__narayani 인스타그램 / 제일 그럴듯해 보이는 포즈를 한 사진을 골라봤다. |
살수록 더 깨닫는다. 세상에는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좋아 보이기만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좋은 게 아니라 나쁜 거다. 그동안 괄시받았던 내 뻣뻣함과 유사 뻣뻣함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 (주)티알앤디에프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